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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이,

때때로 조각의 크기와 무게를 갖는다면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임선이                             

안소연 미술비평가

 선인장을 화분 째 주물 떠서 회색 시멘트로 여러 개 만들어 바닥에 펼쳐 놓고, 눈을 번뜩이며 움츠려 걷고 있는 고양이의 형상을 브론즈로 매끈하게 떠내서 녹슨 조각 받침대 위에 올려 놓아, 그 평범한 형상들로부터 임선이는 우리에게 삶의 피난처를 떠올리게 했다. 작품의 제목은 각각 <Shelter-Landscape>(2003)<그들만의 세상을 기념하며>(2009)였는데, 그 둘이 한데 같이 놓였던 한 전시가 내게는 어떤 무게로 남아있다. 개수를 헤아릴 수 없는 회색 선인장이 제 형상을 또렷하게 나타내며 바닥을 수평으로 가득 차지하고 있었고, 갈색 브론즈로 만든 세 개의 고양이 형상이 빈틈없이 붉게 녹슨 수직의 받침대 위 아래를 배회하고 있었다. 한없이 가볍고 위태로운 형상들이 갖게 된 그 알 수 없는 무게는 무엇으로부터 더해진 것일까? 단단한 물질로부터 온 것인지, 스스로의 존재로부터 온 것인지, 혹은 축적된 시간이 만들어낸 경이로움 때문인지, 어쨌거나, 회색 선인장과 녹슨 받침대 주변을 서성이는 고양이의 형상은 역설적이게도 곧 소멸할 것처럼 끝까지 차오른 어떤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임선이는 그때의 선인장과 고양이와 받침대가 가졌던 알 수 없는 무게와 질감을 내게 다시 환기시키면서 어떤 서사를 가져다가 형상을 구축하는 일에 크게 골몰하고 있는 듯했다.

양자의 느린 시간 Slow time in Quantum(2019)은 세 개의 전시 공간을 아우르는 동선과 그 규모를 통해, 시각적으로 조율된 임의의 시공간을 새로이 가늠하도록 이끈다. 그것은 서사가 멈춰진 하나의 장면으로서, 이 정지된 순간은 마치 스스로의 속도를 무게로 응축시켜 놓은 듯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어긋나버린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떤 시간성을 갖는 서사가 다수의 공간 안에 끌려 들어와 스스로의 무게를 지닌 형상으로 새롭게 구축되는 조각적 사건에 대해서 나는 상상해 보고 싶은 것이다. 어느 때인가, 내가 회색 시멘트 선인장과 브론즈로 만든 고양이를 봤을 때도, 그것들이 어디에서 어떤 서사를 가지고 여기로 온 것인가 보다는 그 형상들이 갖고 있는 무게가 어떻게 획득된 것인가를 나는 신중하게 생각했었던 같다. 그리고 그 무게란, 궁극적으로 조각의 무게였다고 이제 결론지어 본다. 그것은 양자의 느린 시간이 만들어낸 공간에서 그 시간의 속도가 무게로 응축된 사건을 목격한 후다. 그 무게를, 나는 열 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유토피아>(2019) 연작에서 강렬하게 감지했다. 흰 벽 중간쯤에 가로로 나란하게 놓인 흑백 사진 네 장을 지나, 중첩된 벽의 모서리를 사이에 둔 채 따로 놓인 세 장의 컬러 사진을 한참 서서 보고, 거기서 시선을 안으로 바짝 밀어 넣어야 닿게 되는 공간에 서로 다른 높이로 흩어 놓은 세 장의 또 다른 컬러 사진을 모두 보고 나서, 이 사진이 어떤 윤곽으로 포착해낸 무게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의 무게를 인식하는 태도야말로 조각적 사유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을 순식간에 만들어냈다. 그럼, 나는 이 망상을 여기서 그만두지 않고 좀 더 계속해 볼 것이다.

다시, <유토피아>가 남긴 잔상을 떠올려 본다. 사진이 담고 있는 익명의 시간에, 임선이는 어떤 형태의 손을 몸에 지닌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손은 한 사람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제 제 생김새를 사유해낼 자리에 놓여 있다. 그러기 위해, 임선이는 사진 속 80대 이발사의 손과 한참 씨름했던 게 분명하다. 면도칼을 쥔 손과 누워있는 얼굴을 감싼 다른 손 사이의 긴장은 손가락 마디마디에 깊이 남겨놓은 흉터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선으로 중첩돼, 유독 이 형태가 아무런 서사 없이 혹은 전체로서의 몸과 연결 없이 스스로 제 형태의 무게를 만들어내려 하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임선이는 이 연속하는 사진들로 한 사람의 몸과 그것의 서사에 대해 기록하거나 사진의 지표적인 흔적을 남기려는 것도 아니었을 테고, 주물로 떠내 듯 어떤 완결된 형태로 놓일 수 있는 조각적 접근 방법을 찾는 것이었음을 막연하게나마 짐작해보면, 그는 사진에 맺힐 그 대상 자체가 스스로 조각적 크기와 무게를 만들어내는 일련의 완결된 장면들을 찾아 나섰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사물이 혹은 어떤 행위가 혹은 어떤 시선이 스스로 제 무게를 갖게 되는 순간에, 임선이는 조각에 다가간다. 80대 이발사의 손이 가로로 놓인 무채색의 평평한 사진에서, 허공 같은 흰 벽의 한가운데서, 오직 스스로의 무게를 형태 안에 가두는 조각적 사건을 그는 포착한다. 그 노년의 손은 몸의 지체로 살아온 속도를 차츰 잃어가는 대신 스스로 제 형태의 무게를 얻었으며, 시간을 살아가는 대신 공간을 점유하게 되어, 마침내 언젠가는 시간과 속도 같은 그 모든 것을 제 생김새 안에 집어넣어 단단한 무게만이 존재하는 어떤 공간에 이르게 되지 않겠는가. 거기가 사라진 시간들이 당도하게 되는 유토피아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이발소 의자의 금속 발판에 선명하게 새겨 있는 “UTOPIA”라는 단어가 현실에 발 딛고 있는 누군가의 몸을 지탱해 온 시간만큼, 오래된 단어는 그 자리에 몸을 눕혀 생의 순간들을 준비하며 살아갔던 이들과 그 몸을 성실하게 가꾸던 이의 손이 제 스스로 갖게 된 시간의 무게를 나타낸다. 또 다른 사진에서, 80대 이발사의 손은 하얀 비누 거품에 덮인 머리를 만진다. 이때, 그 느린 손은 한없이 가볍고 미끄러운 거품에 제 무게를 맡긴 채 다른 몸과 교차한다. 그리하여 어떤 찰나에 이 모든 게 마치 하나의 물질로 뭉뚱그려진 덩어리처럼 보일 테고, 그 형태는 오롯이 그 덩어리만큼의 무게를 가늠케 할 것이다.

모퉁이를 돌면, 무언가 빠져나간 빈 철제 통에 오래된 군대 계급장이 들어가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던 발걸음이 어딘가에서 완전히 멈추고, 누렇게 뜬 종이에 매달려 내용물이 비워진 녹슨 철제 상자 안에 덩그러니 들어가 있은 지 오래다. 반짝이며, 아버지의 몸이 가볍게 지탱했을 저 표식들이, 시간을 잊고 스스로 제 무게를 만들어내고 있던 녹슨 자리를 본다. 그 물질의 무게를 눈으로 한참 가늠하듯, 임선이는 아버지의 군대 계급장과 그것이 놓인 자리의 현전을 살핀다. 가장 깊숙한 공간, 흰 색 벽 한가운데, 80대 이발사의 손처럼 허공에서 어떤 물질이 돼버린 것 같은 아버지의 손이 보인다. 그 형태가 마주하고 있는 또 다른 사진에는, 느린 손의 무게를 알리는 풍경과 장면이 마치 어떤 형태로 주물 뜬 것처럼 시간을 멀리하고 한 자리에 붙박혀 있다. 손으로 옮겨 삼켜지지 못하고 식탁에 떨어진 밥알만큼, 부지런한 손이 추억 속에 옮겨다 놓은 오래된 수석들만큼, 노년의 아버지가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은 어떤 형태 안에서 묵직한 물질의 무게로 현전하고 있다.

<녹슨 말>(2019)에서, 임선이는 쓸모를 다하고 천장으로부터 내려진 오래된 샹들리에 열 개를 구해서 가져다가 전시장 천장에 매달아 다시 전원을 꽂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비현실적인 두께를 가지려는 듯 바닥은 하얀 소금으로 전부 가려졌고, 화려했던 과거의 유물처럼 기능이 소실된 이 형태들은 스스로를 지탱하는 무게로만 현전을 나타낸다. 일련의 시간을 두고 서서히 점등했다가 서서히 점멸하는 이 연쇄적인 움직임과 각각의 형태들이 지니고 있는 단단한 물질과 심지어는 호흡처럼 간신히 내쉬는 빛의 파장들마저, 임선이는 이 모든 것을 존재의 무게로 수렴시킨다. 소금이 있는 바닥까지 완전히 내려와 있는 한 개의 샹들리에가 그것을 대표한다. 임선이의 시선은, 빛을 완전하게 지탱하여 공간 안에 지속시킴으로써 유토피아를 상상하며 현실을 화려하게 장식해야 할 샹들리에의 크리스탈 조각 부품들이 시간을 지나 마침내 소실되고 그 투명성을 상실한 것에 다가가 그 누락된 자리에 녹슨 말의 무게를 가져다 놓기로 했다. 임선이는 샹들리에의 화려한 형태를 촘촘히 엮던 작은 크리스탈 조각의 단위 형태를 주물로 본 떠 검붉게 녹슨 조각을 수십 개 만들어냄으로써, 천장에서 가볍게 반짝이던 샹들리에를 땅의 한 자리에 내려놓을 만큼의 무게를 얻었다. 이는, 생의 긴 서사와 상상의 미래를 꿈꿔왔던 화려한 빛의 순간들이 이러한 물질의 형태로 어딘가 두께를 알 수 없는 깊은 곳에서 스스로의 무게를 안고 현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임선이는 거기에 노년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메모장 위의 녹슨 말들을 불러와 중첩시킨다. 미래의 시간으로부터 이제는 한참 멀어진 아버지의 과거는, 빛 바랜 메모지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말들의 모양을 본 떠 그만큼의 무게로 남게 될 것이다.

발 밑에 유토피아를 두고 미래를 꿈꿔왔던 80대 이발사의 손과 자신의 몸에서 빛나는 별을 꿈꿔왔던 아버지의 느린 손에서, 화려했던 빛이 서서히 점멸하여 이제는 제 형태와 무게만 지니고 있는 구식 샹들리에와 아버지의 오래된 메모 안의 녹슨 말들에서, 임선이는 노년의 삶을 조각의 형태와 무게로 사유하는 일련의 과정을 탐색했다. <108개의 면과 36개의 시선>(2019)은 그 연속에서 느린 손과 녹슨 말을 거쳐 흔들리는 눈으로 옮겨간다. 거울 면을 이용해 만화경의 구조를 설계한 <108개의 면과 36개의 시선>은 노화된 시력이 갖게 되는 불확실함과 폐쇄성을 암시한다. 탁 트인 전시공간을 암실로 변경하여 공간 전체를 두꺼운 가림막이 내려온 노인의 망막처럼 설계해 놓은 이 장소에 대한 경험은, 흥미롭게도 비현실적인 환영을 집요하게 찾고자 하는 시각의 반응을 불러온다. 게다가, 캄캄한 암실에서 만화경의 거대한 크기와 무게가 나타내는 조형적인 실체는 그림자와 반사 이미지 등을 비롯하여 그것이 만들어내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각적 효과에 대한 암묵적인 믿음을 불러일으키면서, 시각적 능력을 초월한 형태의 크기와 무게에 대한 지각을 스스로의 몸 안으로 끌어오게 한다. 이미 회색 시멘트 선인장과 브론즈로 만든 고양이를 통해 삶의 어떤 무게를 강하게 각인시켰던 것처럼, 그리고 그 둘이 공존하는 공간을 모색했던 것처럼, 임선이는 양자의 느린 시간에서 삶의 형태에 대한 사유를 조각적 크기와 무게로 접근하는 태도와 그것에 대한 시각적 공감의 문제를 다시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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