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야생성 - 도시의 ‘Shelter’
이은주 (미술사)
작업실에 들어가니 맨 먼저 시멘트로 된 선인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창 싱싱하게 자라던 선인장의 형태 그대로가 흑백사진의 한 장면처럼 정지된 채 서있다. 마치 화석화된 식물원의 표본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상용 선인장 화분, 꽃무늬 벽지, 병풍 위에 수놓아진 나비. 임선이의 작업에 등장하는 이러한 모티프들은 모두 획일화된 도시적 일상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이미지이다. 너무나 익숙하게 접할 수 있기에 특별히 문제의식을 가져볼 필요조차 없던 소재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응고된 회색 선인장이 풍기는 인상은 조금도 ‘일상적’이지 않다. 거기에는 오히려 일상의 무덤덤한 컨텍스트를 전도시키는 강한 단절의 효과가 있다.
임선이는 ‘숨은 그림 찾기’라는 이전의 연작들에서 우리의 시각에 너무도 익숙해져있는 도시문명의 풍경들, 예를 들어 시멘트 벽면 위의 전기선, 도시가스 파이프나 여성잡지 표지와 같은 장면들에 슬쩍 자신이 만든 이미지를 끼어넣어 눈에 띠지 않게 변형시키는 작업들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그녀의 작업은 언듯 보기에 매우 일상적이고 평범한 듯 하지만 일상의 단절을 유도하는 차단제가 미묘하게 삽입됨으로써, 익숙한 시각적 환경 위에 일종의 쉼표를 찍는 방식을 취한다. ‘Shelter’라는 주제로 펼쳐진 이번 전시의 작품들 역시 관람자로 하여금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환경들을 사용하여,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들여다보고 해독하도록 이끌고 있다.
‘Shelter’는 외계로부터 보호된 안식처로 여겨지는 일상적이고 사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작품의 모티프로 등장하는 ‘세한도’는 외부와 격리된 개인적 공간에 대한 상징이다. 본래의 세한도에 담겨있는 내적 성찰로서의 고독과 자존적인 자아상의 의미는 싸구려 꽃무늬 벽지나 나비가 수놓인 병풍, 시멘트 선인장의 컨텍스트 속에서 사회문화적인 ‘고립’의 메타포로 변환되었다. 이 작품들에서 임선이가 이야기하고 있는 ‘고립’은 외부의 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이자, 그것으로부터의 단절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작가는 특별히 자연으로부터의 고립이라는 설정을 통해서 도시인의 사적 공간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담의 가죽옷에서 현대의 아파트촌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도구들은 모두 예측불가능한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인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발전되어 왔다. 네개의 콘크리트 벽으로 구축된 우리의 거주지는 외부의 침입을 막는 단단한 ‘쉼터’인 동시에, 자연의 야생성을 거세시킨 지극히 인공적인 공간이다. 도시인들은 이 안식처 안에서 보호받고 있지만, 자연의 에너지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킴으로써 인간 본연의 자연적 조건들에서 멀어진 채 점점 더 인위적인 성벽을 쌓아간다. 자연의 폭력성에 대한 심리적 공포와 자연적 삶에 대한 회귀본능의 중간지대에서, 도시인들은 야생성으로 충만한 자연환경 대신에 박제되고 코드화된 가짜 자연물들로 실내 공간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임선이의 작업은 꽃무늬 벽지를 바르고 애완동물과 관상용 화분을 키우며 살충제를 뿌려대는 현대적 삶의 이와 같은 근본적 딜레마를 상기시켜준다.
자연과 인공물 사이의 애매한 경계선 위에서 애써 유지하고 있는 우리들의 불안스런 균형에 대해서, 임선이는 찬성도 비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미묘한 균형상태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침핀으로 뚫려진 ‘세한도’의 형상이나 디지탈 셀처럼 오려진 동양화의 도상에는 인공화된 자연의 이미지와 외부공간을 향한 최소한의 개방성, 그리고 내부 공간을 향한 은밀한 시선이 교차되어 있다. 임선이의 작업 위에 설정된 외부와 내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경계선은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을 함축한다. 그녀는 모든 것이 인공화된 환경 속에서도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을 따라 힘겹게 자기공간을 확보해나가고 있는 역설적인 우리의 모습이야말로 시멘트 선인장과 같이 인공화된 자연물일지 모른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어조에는 냉소적이지 않은, 일종의 애정어린 연민이 담겨져 있다. 노화와 부패를 거부하고 생성만을 취하려는 현대문명의 위생학이 실상 인간 자신의 나약함의 표현임을 그녀도 알고있음에 틀림없다.